박근혜 퇴진 운동의 기록 since 2016. 10. 29

“박근혜는 퇴진하라!”, 133일의 기억

“박근혜는 퇴진하라”, “박근혜는 하야하라”
두 구호가 청계광장에서 종로 1가,
그리고 광화문까지 거리를 가득 메웠다.

- 10월 29일 첫 번째 촛불 취재기에서...

제작: <노동자 연대>

2013년 1월

지배자들의 자신감은 오래가지 못할 수도 있다.

(1) 부패 추문으로 그들 사이에 심각한 내분이 일어나거나,
(2) 경제 위기가 도무지 완화될 조짐이 보이지 않고 무한정 질질 끄는 듯하거나,
(3) 탄압에도 불구하고 아래로부터의 저항이 매우 드세어지면, (박근혜 정부는 이 세 가지 상황에 직면할 충분하고도 남을 개연성이 있다)

그러면 지배자들의 자신감은 정반대로 좌절감으로 바뀔 것이다.

- 2013년 1월 26일 <노동자 연대> 기사 中

2016년 4월

박근혜의 총선 패배와 우익의 분열

박근혜 3년 간 끊이지 않은 저항, 4월 총선 패배로 인한 우익들의 사기 저하가 <조선일보>와 청와대의 전쟁, 그리고 우병우 스캔들로 이어졌다.

그리고

아래로부터의 저항이 분위기를 띄우다

7월, 성주 사드 배치 반대 투쟁 시작

7월 25일, 갑을오토텍 공장 사수 투쟁 시작

7월 28일, 이화여대 점거 시작

9월 26일, 현대차 전면파업

9월 27일, 공공부문 사상 최대 공동 파업

9월 27일

철도파업 시작

철도 노동자들의 파업이 시작됐다. 철도는 이후 74일간 사상 최장기 파업을 벌이며 촛불에 개근, 박근혜 퇴진 운동 초기의 중심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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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혀지기 시작한 박근혜 비선 권력의 실체

‘도대체 최순실과 정유라가 누구시길래 이렇게’

청와대는 자신의 치부가 드러나는 것에 격분해 반격했다. 〈조선일보〉가 먼저 나가떨어졌다. 이어 특별감찰관실이 공중분해됐다. 박근혜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대응은 ‘도대체 최순실이 누군데’ 하는 의혹만 키웠다. 게다가 늦여름부터 이어진 투쟁들이 반정부 여론을 고조시키고 있었다. 그럴수록 우파의 균열은 커져 갔다.

이런 배경 속에서 마침내 박근혜―최순실을 고리로 한 미르와 K스포츠 두 재단, 정유라와 이화여대, 재벌들과의 정경유착 실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10월 24일

다급하게 던진 박근혜의 개헌 카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덮기 위해 박근혜는 개헌 카드를 던졌다. 이 카드는 야당에게 먹히는 듯했다.

같은 날

개헌 카드 잠재운 〈JTBC〉 태블릿PC 보도의 충격

그러나 같은 날 저녁, 〈JTBC〉가 태블릿PC를 입수해 보도하면서 여론은 큰 충격을 받았고, 사태는 급격히 발전했다.

10월 25일

첫 번째 담화

어설픈 사과는 불난 집 부채질일 뿐

박근혜는 최순실의 존재를 인정했다.
박근혜 퇴진 성명이 쏟아져 나왔고, 박근혜 지지율은 17퍼센트로 폭락했다.

10월 26일

청년들이 거리로 나서다

청년총궐기 추진위가 집회를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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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6일

문재인, 대통령 2선 후퇴와 거국 중립 내각 구성 제안

10월 28일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철새 똥에서 조류 인플루엔자(AI) 발견

10. 29 ~ 12. 10

파죽지세

40일 만에 국회 탄핵을 이끌어 내다

드디어 거리로, 10월 29일 1차 촛불

“박근혜는 퇴진하라”

“박근혜 퇴진/하야” 구호가 청계광장에서 종로1가, 그리고 광화문까지 거리를 가득 메웠다.

10월 29일 오후 5시 철도노조 결의대회부터 청계광장으로 모이기 시작했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아 움직이기도 힘들었다. 청계천에 모인 사람들이 종로로 거리 행진을 나가는 데만 30분이 넘게 걸렸다.

파죽지세

정권 퇴진 요구는 4년 내내 노동자·서민을 쉴 새 없이 못살게 군 박근혜 정부를 향한 분노이자 노동 개악과 교육 개악, 고통전가 정책 중단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주말 집회에서 성난 민심이 표출될 것을 걱정해 청와대와 새누리당 지도부가 긴급 회동을 하고 청와대 수석들의 일괄 사표를 받고 정호성 등 문고리 권력들까지 압수수색을 하는 쇼를 벌였지만, 이미 봇물 터지듯 분출한 분노를 잠재울 순 없었다. 박근혜 퇴진 요구가 단지 최순실 사건에 대한 불만에서만 비롯한 것이 아님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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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태는 급박하게 돌아갔다

10월 30일. 박근혜는 이원종, 안종범, 우병우와 문고리 3인방을 경질했고, 최순실이 귀국했다.

10월 31일. 새누리는 야당이 제안한 거국 중립 내각을 받으려 했고, 이제는 야당이 거부했다.

11월 2일. 박근혜는 김병준을 총리로 지명하는 꼼수로 사태 변화를 꾀했다.

운동도 발전하고 있었다.

11월 1일에는 전국 대학생 시국회의가 결성됐고,

11월 3일에는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이 박근혜 퇴진과 구조조정 중단을 외치며 4시간 파업과 행진을 벌였다.

그리고 11월 3일

눈치 보던 검찰이 최순실을 구속했다.

11월 4일

박근혜 2차 담화

2차 촛불을 하루 앞둔 11월 4일, 박근혜는 두 번째 담화를 발표했다. 눈물 쇼와 함께 박근혜가 주장한 것은 "나는 몰랐고, 쟤들이 문제다" 하는 것이었다. 

박근혜의 지지율은 5퍼센트로 폭락했고, 검찰은 검사 32명을 더 투입해 이미 중수부급으로 격상된 최순실 특수본을 역대 최대급으로 만들었다.

11월 5일, 2차 촛불

일주일 만에 수십만 시위로 발전하다

서울 20만, 전국 30만

11월 5일 광화문 광장은 물론 종로와 서울시청 일대가 ‘박근혜는 퇴진하라’, ‘박근혜가 몸통이다’, ‘사과 말고 퇴진하라’는 목소리로 가득 찼다.

전국 곳곳에서 열린 집회까지 합하면 모두 30만 명이 참가한 것으로 집계됐다.​ 말 그대로 남녀노소 모두 참가했다. 아이들과 함께 나온 부모들, 교복을 입고 친구들과 함께 나온 중고등학생들도 많이 눈에 띄었다.

박근혜가 2차 대국민 담화 ‘쇼’를 하고, 경찰은 행진을 불허하겠다며 협박했지만, 책임 회피에 급급한 박근혜의 ‘사과 아닌 사과’는 대중의 분노에 더욱 불을 붙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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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은 박근혜를 파죽지세로 몰아붙였다

11월 6일, 2차 촛불 다음날 검찰은 안종범 · 정호성을 구속했고, 우병우를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했다.

11월 7일, 김무성은 박근혜에게 탈당을 요구했다.

야당은 신뢰하기가 힘들었으며,

뒷걸음질치던 박근혜는 국회 합의로 추천한 총리를 수용하겠다는 카드를 던졌고, 야당은 이 카드를 만지작댔다.

촛불은 계속 발전해 갔다

11월 9일, 박근혜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 결성

이 와중에...

11월 9일: 미국에선 트럼프 당선이 확정됐고

11월 16일, 아직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지만: 조류 인플루엔자(AI) 초기 대응에 실패했다

11월 12일 1백만 민중총궐기/3차 촛불

3주 만에 촛불은 들불이 됐다

박근혜 정권을 향한 노동자 민중의 분노가 폭발하고 있다. 1백만 명 넘는 사람이 광화문과 시청광장 일대, 태평로를 정말 가득가득 채웠다. 행진 코스가 이미 인파로 가득차 행진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박근혜 퇴진 운동은 박근혜 정부에 강력한 일격을 가했고, 정치적 도약을 이뤄냈다.

노조를 파괴하고 임금 삭감을 강요당한 세월, 청년들을 좌절케한 불평등한 현실, 너무나 끔찍하고 야비했던 세월호 참사와 진상규명 방해 공작, 백남기 농민을 죽게 한 살인진압, 청와대와 연결된 거의 모든 상층의 부패와 뻔뻔함이 오늘 분노와 항의의 도마에 올려졌다.

민주노총 노동자들이 가장 많았고 교복 입은 청소년, 친구들과 무리 지어 나온 청년들의 활기찬 모습이 특히 눈에 띈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젊은 부부들도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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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2일 오후 2시

전국 노동자대회

오늘의 수십만 집회와 행진의 선두에는 민주노총 노동자들이 서 있다. 강성 우익 정부의 등장으로 많은 이들이 당황해 하고 있을 때부터 저항의 선두에 서 왔던 노동자들이다. 금속 노동자들, 학생들과 함께 나온 전교조 교사들, 올 가을 파업 투쟁으로 오늘의 이 투쟁에 징검다리가 된 철도를 포함한 공공 노동자들, 보건 노동자들, 공무원 노동자들이 그들이다. 가족들과 함께 자리잡은 노동자들도 많았다.

민주노총 최종진 위원장 직무대행은 민주노총이 계속 박근혜 퇴진 운동의 선두에 서겠다고 약속했다

11월 12일 오후 2시

대학생과 시민 행진

대학생 1만 5천여 명은 대학로에서 집회를 하고 시청을 향해 행진했다. 이렇게 대규모의 대학생들이 모여 도심 거리 행진에 나선 것은 수 년만의 일이다. 수십 개 대학의 총학생회와 동아리, 청년 · 학생 단체 등 1백 여 곳의 깃발이 휘날렸다. 서울 소재 대학뿐 아니라 전남대, 부산대 등 지방에서 온 학생들도 많았다. 이들은 새벽 첫차를 타고 이곳으로 달려왔다.

학생들은 “박근혜는 지금 당장 퇴진하라”고 외쳤고, “오늘 당장 우리 힘으로 끌어내리자”고 외쳤다. 특히 학생들은 너무나 선명한 이 사회의 불평등에 크게 분노했다. 집회에서 한 발언자는 오늘도 새벽 4시까지 아르바이트를 하다 왔다면서 “돈도 없고 빽도 없는” 우리에게 이 나라는 너무나 살기 힘들지만 정유라 같은 자는 권력을 등에 업고 온갖 특혜를 얻었다고 울분을 토했다.

대학로 다른 한편에서 모인 1만 여 명의 ‘시민대행진’ 대열도 대학로에서 시청까지 행진했다. 416가족협의회의 유가족들도 노란색 잠바를 입고, “하야하라”가 적힌 띠를 등에 메고 1백50여 명이 행진했다. 이른바 ‘386 세대’로 불린 중장년층이 많았다. 자신들이 민주화를 이룩했다는 자부심으로 살았을 이들에게 박근혜 정권의 부정부패와 민주적 권리 침해는 자기 인생을 부정당하는 듯한 충격이었을 것이고, 이는 분노와 행동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11월 13일

1백만 시위 다음날, 검찰은 박근혜를 조사하겠다고 발표했다.

내분 겪는 여당

87년 이래 가장 큰 시위가 벌어졌고, 새누리당은 내분에 빠졌다.

눈치보는 야당

11월 14일, 추미애는 박근혜에 여야 영수회담을 제안했다. 궁지에 몰려 있던 박근혜에겐 희소식이었다. 박근혜는 즉각 화답했다.

성토가 쏟아졌다. 퇴진행동, 민주노총, 정의당, 참여연대, 박원순 시장까지.

더민주는 박근혜 퇴진을 당론으로 결정하고 결국 영수회담을 취소했지만 곧 퇴임 후 안전 보장으로 거래를 시도했다.

3일 후인 11월 17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특검이 국회를 통과했다. 국정조사도 시작됐다.

몽니 부리는 박근혜

11월 15일, 박근혜는 검찰 수사를 거부했다.

다음날에는 LCT 비리 수사를 지시하고 채널A를 제소했다.

11월 19일에는 국무회의 복귀 의사를 표시하고, 세월호 7시간 해명글을 게시했다.

11월 17일, 새누리당 김진태 의원은 “촛불은 바람 불면 꺼진다” 하고 촛불을 도발했으며

19일에는 박사모가 첫 집회를 열었다.

 

11월 19일, 4차 촛불

전국 95만, 퇴진 말고는 답이 안 된다

주최측 추산 서울 60만, 전국 35만, 도합 95만 명이 박근혜 퇴진을 요구하며 모였다. 대도시들만이 아니라 소규모 시, 읍에서도 집회들이 소집됐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박근혜 퇴진의 함성이 메아리친 것이다.

이날 집회는 규모만이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성공이었다. 예상대로 수능을 끝낸 청년들이 대거 참가한 것을 눈으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오늘은 민주노총에 이어 한국노총 노동자 2만여 명이 자신들의 요구 노동개악 반대 요구와 박근혜 퇴진 요구를 결합해 조직적으로 참가했다. 거리 행진은 곳곳에서 환영받았고, 대열이 늘어났다.

그럼에도 박근혜의 반격은 교활하게, 때로는 역겹게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그럴수록 판돈은 오히려 커져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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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고 재학생의 발언

“사고라고요? 웃기지 마세요. 당신은 살인자에 불과해요. 변명할 시간에 반성하고 책임지시길 바랍니다. 4월 16일 이후부터 저는 단 한 순간도 제대로 잠을 잔 적이 없습니다. 매일밤 언니 오빠들이 저의 꿈에 나타나 살려달라고 소리칩니다. 당신은 살인자에요. 이걸 꼭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여자라고 말씀하셨는데, 당신은 여자이기 이전에 대통령입니다. 사생활이라고요? 그런 것 챙기실 거였으면 그 자리에 서면 안 되는 거였습니다. 그 무게를 견디실 수 없으면 내려놓으십시오. 당신은 자격이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외치겠습니다. ‘세월호를 인양하라’, ‘리멤버 20140416’”

1백만 촛불이 사태를 몰아 붙이다

11월 20일, 검찰은 수사 중간 결과를 발표하며 박근혜 범죄 피의자로 명시했다.

야권 대선 주자들은 국회 탄핵에 합의했다.

11월 23일, 김무성은 불출마를 선언하며 박근혜 탄핵을 약속했다.

법무장관과 민정수석은 박근혜에 항명한 후 사퇴했다.

11월 25일

박근혜 지지율은 4퍼센트로 떨어졌다.

11월 26일 5차 촛불, 사상 최대 전국 190만

“너희들은 포위됐다”

박근혜의 발악에 분노가 더 커지다

제5차 범국민행동의 날은 사상 최대 규모 시위였다. 주최측 공식 발표는 연인원 기준 서울 150만, 전국 190만(서울 포함) 명이다. 박근혜 퇴진 운동은 2주 만에 1백만 명을 넘어섰고(민중총궐기), 그 뒤 2주 만에 다시 역대 최대가 된 것이다. 

운동이 굳건하게 자리를 잡으면서, 박근혜의 이런저런 반격 시도가 제대로 먹히질 않았다. 아래로부터의 행동이 자아낸 압력이 가장 중요한 국가기관 하나가 박근혜에 반기를 들게 만들고, 여권 내 분열을 앞당겼다. 야당은 국회 탄핵 절차를 시작하려고 한다. 이날 법원은 청와대 앞 100미터 앞까지 행진을 할 수 있도록 했으며, 촛불은 청와대를 포위했다.

이런 상황이 다시금 박근혜 퇴진 여론에 새로운 기름을 부은 것 같다. 새로운 ‘콘크리트 지지율’이라던 5퍼센트 벽을 3주 만에 밑으로 돌파해 박근혜 지지율은 4퍼센트가 됐다. 중도 퇴진 지지가 80퍼센트가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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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9일

“연쇄 담화범” 박근혜는 3차 담화를 발표했다.

“정치권 일정과 법 절차 따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

국회 탄핵 절차를 앞두고 던진 꼼수에 마지못해 탄핵으로 향하던 주류 야당과 새누리당 탄핵파는 혼란에 빠졌다.

12월 1일, 탄핵안 상정이 불발됐다.

12월 3일 6차 촛불, 사상 최대 전국 2백32만!

서울 160만 ‘즉각 퇴진 열차’ 청와대로 돌진

시위 규모 기록 또 경신

하루라도 못 참겠다고 매주 시위 규모가 일주일 만에 사상 최대치를 갱신했다. 이날 행진은 전 주보다 더 거세고 성난 기세가 확연했다. 즉각 퇴진을 바라지만, 박근혜가 버티는 상황에서 국회가 탄핵 절차를 시작도 못하는 것에 잔뜩 성이 난 것이다.

이날 확인된 사실은 정국을 규정하는 정치적 대립 전선은 박근혜 정권과 거리의 즉각 퇴진 운동 사이에 있다는 것이다. 많은 정치세력들이 이날 시위를 보고서 국회의 탄핵소추 가결 말고는 분노의 폭발을 막기 힘들다고 여겼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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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5일

탄핵안이 상정됐다

눈치보던 야당은 또 한 번 기록을 경신한 촛불에 놀라 탄핵안을 상정했다.

12월 9일

탄핵안 가결은 민중의 투쟁이 낳은 성과

즉각 퇴진 투쟁은 계속돼야

박근혜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2백34표로 가결됐다. 국회 재적 대비 78퍼센트 찬성이고, 새누리당 의원의 절반 가까이가 탄핵소추에 찬성했다. 집권당도 거의 절반이 등을 돌려 박근혜의 대통령 직무가 정지됐다.

즉각 퇴진을 요구하며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외쳐 온 민중의 투쟁에 국회가 압박당한 결과다.

의회 정치인들은 자칫하다가는 자신들에게도 분노의 불길이 옮겨 붙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성난 여론을 국회 탄핵으로 제도권 안으로 수렴해야 한다는 생각도 했을 것이다

12월 10일

탄핵안 가결 뒤에도 1백만이 박근혜 즉각 퇴진을 요구하다

서울 80만, 전국 104만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어도 전국에서 1백만 명 넘는 사람들이 또다시 박근혜 즉각 퇴진의 촛불을 들었다.(주최측 발표: 오후 8시 현재, 서울 광화문 80만 명을 포함해 전국 1백4만 명)

그러나 국회 탄핵소추안 가결 직후부터 많은 언론과 의회 정치인들은 국회가 민심을 수용했으니, 이제는 일상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사람들은 국회 탄핵소추안 가결을, 옳게도 6주간 거리 투쟁으로 보여 준 민중의 힘 때문이라고 여긴다. 자신들의 힘으로, 철옹성 같아 보이던(또는 그렇게 믿기를 강요당해 왔던) 그 정권이 서서히 허물어지는 것을 보면서 정치적 사기도 올랐다. 상황을 전진시키는 힘이 제도권 정치가 아니라 바로 자신들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자각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탄핵안 가결 다음 날 자신들이 거리로 나오지 않으면 박근혜 일당이 그것을 어떻게 판단하고 이용할지 꿰뚫어 본 것이다. 제도권 정치에 믿고 맡기기도 탐탁치 않다는 건 지난 한 달여 상황에서 크게 드러난 바다.

이날 집회는 한층 밝았고, 그럼에도 분노는 여전했고, 힘이 있었다.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 상황에서도 2차 행진에 수십만 명이 물밀듯이 청와대로 향했다. “국회도 탄핵했다, 박근혜는 당장 물러나라”, “하루도 보기 싫다”, “박근혜 구속 수사”, “황교안도 꺼져라”, “정현아, 장 지져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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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탄핵 이후 1월 하순까지

국회 탄핵 후 숨고르기

황교안 권한대행 체제의 시작과 주류 야당 헤게모니의 부분적 회복

탄핵 후 박근혜 없는 박근혜 정권,

황교안 체제가 시작됐다

박근혜는 탄핵 직후 각종 개악을 지속할 것을 주문했으며, 세월호 조사를 방해한 조대환을 민정수석에 앉혔다.

우익이 반격을 준비하는데도 주류 야당은 황교안 공격하기를 부담스러워했다.

그러나 촛불은 적폐 청산을 본격적으로 요구하기 시작했다. 

12월 9일, 금융위는 민간은행들에 성과연봉제 강행을 지시했다. 

12월 11일, 국방부는 사드를 5월 이전에 배치 완료하겠다고 선언했다.

12월 15일, 교육부는 국정 역사교과서 강행 의지를 피력했다.

 

12월 10일, 우익은 첫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1만이 모였다.

12월 17일, 우익 집회는 규모가 더 늘어, 2만 명이 청와대 방면으로 행진했다.

 

12월 9일, 민주당은 황교안 대행 체제 인정, 협의체를 제안했다.

12월 13일, 야3당이 황교안에 합동 회동을 제안했다. 그러나 황교안이 거부했다.

12월 16일, <한겨레>는 황교안(당시 법무부 장관)의 세월호 사건 수사 외압 행사 의혹을 폭로했다.

12월 17일, 8차 촛불

“하루도 보기 싫다. 박근혜 · 황교안은 물러나라”

탄핵소추안 가결 뒤, 주류 야당부터 보수 언론들까지 이제 ‘거리의 정치’는 접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퇴진 운동을 지지한 사람들 대다수는 그것이 사탕발림이거나 허망한 기대임을 간파한 것 같다. 탄핵안 가결 후 2주 째 집회와 행진에도 연인원 서울 65만, 전국 77만 명이 집회에 나왔다.

변명과 부인으로 일관한 박근혜의 헌재 답변서, 국회 청문회가 준 실망과 분노, ‘박근혜 없는 박근혜 정부’를 공고히 하려 한 황교안, 국정 역사교과서 강행,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에 중형 선고, 기소되지 않은 재벌 기업주들 등 적폐들이 아직 제거되지 않고 있는 것이 짜증과 분노를 더 자극했을 것이다.

영상 출처: 유튜브 아이디 rosysea2002 님(닉네임 Younghan K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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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고 2학년 3반 유예은 아버지

유경근 집행위원장 발언

박근혜가 탄핵당했다. 참으로 마음이 뜨겁다. 수많은 촛불의 힘이었다. 그런데 박근혜와 그를 비호하는 무리들은 고개를 꼿꼿이 들고 버티고 있다. 여기 있는 우리는 단 한 명도 이해 못할 일이다.

수많은 촛불들 덕분에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이 이제야 조금씩 첫발을 떼기 시작했는데, 참사 책임자들의 실체가 드러날 때마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감당하기 어려워서 고통스럽다.

하지만 괜찮다. 저희의 고통은 배 안에서 죽어간 아이들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기에, 저희는 더 많은 진실을 원한다. 그러니 여러분 인정사정 없이 낱낱이 밝혀 달라.

세월호 가족들은 지금 새롭게 힘을 얻고 있다. 모두 이 자리에 계신 촛불들 덕이다. 감사합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싸우겠습니다!

4.16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을 위한 피해자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 2학년 3반 24번 예은이 아빠 유경근

12월 24일, 9차 촛불

“즉각 정권 퇴진, 조기 탄핵” 크리스마스

영하의 날씨임에도 24일 서울 광화문광장에 열린 “끝까지 간다! 박근혜 정권 즉각 퇴진·조기 탄핵·적폐청산 9차 범국민행동의 날”에는 60만 명(주최측 추산, 전국 70만 명)이 모였다. 부산에서도 7만 명이 모였다.

사람들은 연이은 강력한 대중 시위로 박근혜 직무를 정지시키고, 새누리당을 쪼갠 것에서 힘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유례 없는 시위가 국민적 지지를 받고, 곤두박질 친 박근혜 지지율이 회복되지 않는데도 박근혜 정권이 버티는 것, 야당이 탄핵소추 가결 후 운동과 거리를 두는 것에도 고민이 많을 것이다. 이날 구호 중 “황교안이 박근혜다”(황교안 사퇴 요구)가 집회와 행진 방송차에서 인기를 끈 것도 그런 의지의 표현으로 보인다.

한 중학교 1학년 학생도 자유 발언에서 “박근혜가 탄핵됐다고 당연히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진짜 국민들이 원하는 게 뭔지 고민하시라”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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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뒤에는 꼭 무슨 일이 벌어졌다

12월 27일에 새누리당 분열해 개혁보수신당이 결성됐고, 같은 날 한국사 국정교과서 전면 적용이 1년 유예됐다.

12월 30일에는 해고 위협에 놓였던 GM 창원공장 비정규직 3백69명이 고용 연장에 성공했다.

하지만

황교안은 가만히 있을 생각이 없었다

12월 27일, 황교안은 국가보안법 위반 신고 포상을 4배 인상했고,

1월 5일, 노동자의 책 이진영 대표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12월 27일엔 사이버안보기본법안을 통과시켰으며, 

12월 29일에는 위안부 합의를 유지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1월 4일 외교·안보 관련 업무보고에서는 사드 배치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체결을 “굳건한 안보”를 위한 중요한 성과로 소개했다.

심지어 황교안은 훈령으로 세월호와 5.18 추모 금지를 시도하기도 했다.

민주당과 국민의당은 여전했다

11월 하순에 철도노조 파업 종료를 종용해 문제를 일으킨 주류 야당들은 국회 탄핵안 가결 이후에도 별반 태도가 달라지지 않았다.

12월 19일, 더민주가 내놓은 “촛불 시민혁명 입법·정책 과제”에는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빠져 있었다. 

1월 12일, 더민주 원내대표 우상호가 제시간 22개 개혁 입법에서도 백남기 특검과 세월호 특별법, 사드 배치 철회, 성과연봉제 철회 등은 빠져 있었다.

1월 8일, 더민주와 국민의당은 여야정 협의회를 꾸려 황교안과 첫 논의를 시작했다.

결국 1월 11일에는 성주·김천 주민들과 원불교가 민주당사 점거 농성을 시작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12월...

조류 인플루엔자(AI)가 빠르게 확산해 계란값이 폭등했다.

12월 31일, 10차 촛불

1백만 명이 소리친 광화문 “송박영신”

촛불 누적 1천만 돌파

박근혜 퇴진 운동이 두 달여 만에 연인원 1천만 명을 넘어섰다. 이날 사람들의 표정은 밝았고, 기세도 좋았다. 분노도 뜨거웠다. 한일 위안부 합의 1주년을 맞아 이를 변경할 수 없다거나 블랙리스트 작성을 주도한 것을 알려진 자를 문화체육부 차관으로 임명한 황교안의 작태는 사람들에게 아직 우리 운동이 현재진행형임을 환기시켜 준 사건이었다. 

이날 행진에서는 “황교안은 박근혜다, 황교안은 퇴진하라” 구호가 많이 외쳐졌다. “박근혜를 구속하라” 팻말이 많이 눈에 띄었고, “황교안 내각 퇴진” 팻말도 인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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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라가 덴마크에서 체포됐다

특검은 국민연금이 이재용의 경영승계에 이용됐음을 밝혔다

2017년 1월 1일

“세월호 … 작년인가, 재작년인가요”

박근혜는 기자단 신년 간담회로 기자들을 초대한 뒤 녹음도 못하게 하고는 변명만 늘어 놓았다.

이 자리에서 박근혜는 세월호 참사가 언제 일어났는지도 기억 못한다고 했다.

그것이 진짜든, 면피용이든 그것은 세월호 참사를 애도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분노케 했다.

2017년 1월 7일 11차 촛불

“세월호는 올라오고, 박근혜는 내려가라”

서울 60만, 전국 65만

1월 9일이 세월호 참사 1천 일이 되는 날이었다. 온갖 탄압과 모욕 속에서도 유가족과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 운동은 전국적·민중적 지지를 받으며 힘겹게 전진해 왔다.

그러나 세월호 운동은 마침내! 박근혜를 청와대로 유폐시킨 대중운동의 선두에 섰다. 세월호 쟁점을 거의 단독으로 부각시킨 집회에도 6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인 것이다. 세월호 참사 생존 학생들도 나와서 큰 지지를 받았다. 416가족협의회 유경근 집행위원장의 발언이 이 날 집회 참가자들의 마음일 것이다.

“지금까지의 1천 일은 힘들었지만, 앞으로의 1천 일은 전보다 희망적일 것 같은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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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4일 12차 촛불, 소강기

혹한의 추위에 10만이 모여 “박근혜 퇴진, 재벌 총수 구속”을 외쳤다

서울 13만, 전국 14만6천

체감온도가 영하 13도까지 떨어지는 추운 날씨에도 연인원 13만 명이(주최측 발표) 광화문광장에 모였다. 서울 다음으로 퇴진 운동이 강력한 부산에서도 오늘 1만 명이 모였다.

군사독재 정권의 야만적인 고문으로 돌아가신 박종철 열사 30주기이기도 해서 숙연한 분위기들도 있었지만, 표정들도 밝았고, 행진 분위기도 힘찼다.

권력 농단과 고통전가의 한 축인 기업주들에 대한 분노와 항의가 두드러졌다. “재벌도 공범이다”, “재벌 총수 구속하라”, “재벌 특혜 철폐하라” 같은 구호들이 행진에서 인기를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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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하순부터 2월 초순까지

우익의 준동

탄핵 불복의 명분을 만들며 우익 결집을 강화하다

 

 

 

 

 

 

 

 

혹한으로 시위 규모가 줄고, 설 연휴 때문에 대규모 촛불을 한 주 쉬는 틈을 타 우익은 반동적 총공세를 펼쳤다.

1월 19일에는 이재용 구속 영장이 기각되고, 1월 25일 박근혜는 우익 인터넷 언론과 인터뷰를 하며 자기편에 메시지를 전했다. 같은 날 최순실은 민주투사 코스프레를 했다. 한편, 대선 국면이 사실상 시작되면서 민주당은 점점 더 "부자 몸조심"을 하기 시작했다

1월 21일 13차 촛불

“김기춘도 구속됐다. 이재용과 재벌총수들도 구속하라”

서울 32만, 전국 35만

이날도 참가자들은 자신들의 투쟁이 단지 박근혜 일당 제거에만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줬다. 

“[삼성의 비정규직 불법 사용과 뇌물·횡령에 대한] 면죄부는 잘못이다. 우리 민중들을 무시하고 옆구리를 긁어대는 면죄부다! 하지만 이 두 가지 면죄부는 모두 시한부다. 왜냐면 우리가 곧 면죄부를 무효로 만들 거니까!”(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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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의 힘은 여전했다

1월 21일, 김기춘 · 조윤선이 구속됐다.

1월 25일, 한국노총 신임 위원장은 노사정위를 거부했으며,

1월 31일에는 철도 취업규칙 개악(성과연봉제에 따른) 효력 정지 가처분 신청이 받아들여졌다.

2월 1일, 반기문은 대선을 포기했고, 

2월 3일, 대법원은 2013년 철도 파업에 대해 무죄를 판결했다.

설 연휴를 틈타

우익의 준동이 본격화했다

1월 24일, 새누리당·바른정당은 표창원을 국회 윤리위에 제소하겠다고 했다.

1월 25일, 박근혜는 ‘정규재 TV’와 인터뷰하며 우익에 메시지를 전달했으며, 

같은 날 최순실은 특검에 출석하며 “민주 특검이 아니다” 하고 고성을 질렀다.

《제국의 위안부》 박유하는 무죄 판결을 받았고,

최경희 이화여대 총장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는 기각됐다.

2월 3일, 청와대는 특검의 압수수색을 거부했으며

우익의 관제 데모도 지속했다.

“염병하네”

2. 4 ~ 3. 4

다시 불타오르다

우익의 준동에 촛불은 경각심을 느꼈다

우익이 설 연휴 직전부터 준동을 본격화하자, 설 연휴가 끝나고 촛불은 다시 커지기 시작했다.

2월 4일 14차 촛불

“2월에는 탄핵하라”

서울 40만, 전국 42만5천5백

“될 때까지 모이자” 오늘 본 대회에서 가장 호응이 컸던 구호다. 설 연휴로 토요 집회를 한 주 쉬는 동안 박근혜 일당이 드러낸 사악한 집념을 반드시 꺾어버리겠다는 투지의 발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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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1일 15차 촛불

이것이 민심이다! 75만이 청와대와 헌재를 포위하다

서울 75만, 전국 80만6천

올해 들어 가장 많은 규모였다. 그 전 주의 두 배다. 박근혜 일당과 우익들의 조잡한 반격에 분노한 75만 명이 광화문에 모였다. 집회 후에는 수십만 명이 청와대를 세 방향에서 행진해 포위했다. 이 대열 전체가 다시 모여 헌법재판소로 향했다. ‘2월 탄핵’을 요구하는 행진은 강렬했다. 이는 1월 하순부터 본격화된 우익들의 공세에 사람들이 경각심과 분노를 크게 느꼈음을 보여 준다.

도대체 악행과 부패 문제로 탄핵으로 내몰린 권력자가 ‘나를 지지하는 시위가 고맙다’며 사악한 권력을 뻔뻔하게 이어가려는데, 누군들 참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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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7일: 이재용 구속

2월 15일: 최경희 이화여대 총장 구속

2월 17일: 노조파괴 유성기업 사장 유시영 구속

2월 18일 16차 촛불

“이재용도 구속됐다. 박근혜도 끌어내려 구속시키자”

서울 80만, 전국 84만4천

확실히, 삼성 이재용의 구속은 박근혜 정권 퇴진 운동 참가자들을 뿌듯하게 했다. 이재용이 뇌물죄로 구속돼 박근혜 탄핵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유죄 판결을 받아도 한 번도 구속되지 않았다는 ‘삼성 신화’가 깨진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 어려운 일을 해 낸 것이 바로 넉 달째 이어 온 퇴진 운동인 것이다. 그래서 오늘 광장에 모인 사람들에게는 자부심이 느껴졌다. 행진 때도 활력과 분노가 잘 표출됐다. 흥겨움도 느껴졌다. 이화여대 한가은 학생은 최근 상황을 보며 “권선징악이 현실에서 가능하다는 걸 느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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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 야당의 “부자 몸조심”

촛불은 거세게 타오르고, 우익은 발악하는 가운데 야당의 몸조심은 더 심해졌다.

이미 12일, 정의당을 제외한 여야 4당이 탄핵 심판 결과에 승복하기로 합의했고,

13일, 문재인은 보수 기독교 단체들을 만나 동성결혼과 차별금지법 제정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19일, 안희정은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 그분들도 선한의지로 우리 없는 사람들과 국민들의 위해서 좋은 정치하시려고 그랬습니다” 하고 말했다.

23일에는 황교안이 특검을 연장할지 말지 밝히지도 않았는데 특검법 개정 국회 처리를 포기했다.

탄핵 평결을 앞두고 격렬한 쟁투를 벌이다

우익의 발악

2월 13일, 김정남이 피살됐고, 언제나처럼 우익은 이를 이용했다.

2월 22일, 우병우 구속영장이 기각됐으며

박근혜 변호인단은 탄핵 판결일이 다가오자 “아스팔트 길이 피와 눈물로 덮인다”는 둥 막말과 폭언을 서슴지 않았다. 

2월 25일 17차 촛불

다시 모인 100만, 이것이 우리의 답이다

서울 1백만, 전국 1백7만8천

2월 25일은 박근혜가 취임한 지 만 4년 되는 날이었다. 4년 전 박근혜는 박근혜 취임식이 열린 국회 앞에서는 박근혜를 규탄하는 노동자들이 연행됐다. 눈 내리던 그 날, 소방관들은 취임식장 의자들의 눈을 닦아내는 데 동원됐다. 박근혜 정부의 안전 무시는 그 때 이미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취임 만 4년이 된 오늘, 청와대는 성난 사람들 1백만 명에게 포위됐다. 이 배후에는 압도적 박근혜 탄핵 지지 여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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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7일: 황교안, 특검 연장 거부

2월 27일: 사드 부지 확정

2월 28일: 철도공사, 성과연봉제 반대 파업 참가 조합원 징계

3월 1일: 우익 10만 관제 데모 동원

3월 1일 18차 촛불

“우익 준동 우습다. 반드시 박근혜를 쫓아낸다”

서울 30만

박근혜 일당의 생떼가 이른바 삼일절 탄핵 기각 집회로 마치 큰 여론인 듯 비춰질까 봐 30만 명(연인원, 주최측 발표)이 광화문 광장으로 나왔다.

지난주 토요일 시위 참가자 수(1백만 명)보다 줄었지만, 우익이 삼일절의 상징성과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독차지하지 못하게 할 수는 있었다. 

우리 측이 정치적 분수령의 날에 충분히 동원하지 못한 반면, 우익은 전국 총동원을 했다. 퇴진행동 측이 삼일절 동원을 늦게 발동한 것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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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8일: 이화여대 경비 노동자들 본관 점거 농성 시작

3월 2일: 문명고 학생들, 국정 역사교과서 반대 시위. 입학식 취소.

3월 2일: 서울대 비학생조교, 점거 투쟁 시작

3월 3일: 이화여대 경비 노동자들 투쟁이 4일만에 승리했다.

3월 4일 19차 촛불

진짜 민심을 보여 준 105만의 분노

서울 95만, 전국 105만

3월 1일 청와대가 삼일절 우익 집회에 고무돼 4일(토) 집회도 기대한다고 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지난 다섯 달 동안 거리를 지켜 온 1천5백만 촛불에게는 이런 보도 자체가 모욕이었을 것이다.

이런 방자함이 교만한 착각이자 기만임이 드러나는 데 3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날 1백만 가까운 사람들이 다시 광화문광장을 채웠다. 이날 참가자들은 광장과 거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보여 주고 싶어했다. 아마도 탄핵 전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주말 촛불에 꼭 참가해야 한다는 마음도 컸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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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0 ~

마침내 파면! 승리하다

헌재에서 만장일치 파면

민중이 승리했다!

탄핵 인용은 끝이 아닌 시작

 

 

 

지긋지긋한 박근혜를 만 4년 만에 민중의 힘으로 중도 하야케 했다. 마침내!

이날 헌재 심판정에서 또박또박 읊어진, 단 열한 글자가 전국 곳곳의 사람들을 감격케 했다.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박근혜 탄핵의 기쁨과 세월호가 탄핵 사유에서 빠진 섭섭함이 뒤섞인 감정으로 오열을 하고 박수를 치고 서로 얼싸 안았다. 이른 아침부터 헌재 앞에 모인 사람들도 해냈다는 기쁨으로 벅차오르는 감격을 숨기지 못했다. 감격의 눈물과 환호의 시간 뒤로 너무나 자연스럽게 한 구호가 점점 커지며 울려 퍼졌다. “박근혜를 구속하라!” 사람들은 한달음에 청와대 앞으로 행진해 갔다.

박근혜 파면은 1백33일간 눈비를 마다않고 광장을 지킨 1천5백만 촛불의 긍지이고 훈장이다. 그리고 지난 4년간 반(反)박근혜 투쟁의 선두에 서 왔던 노동운동의 자부심이다. 공장에서, 대학에서, 성주에서, 진주에서 전국 곳곳에서 정권의 악행에 맞서 싸워 온 민중의 정의다.

그러나 박근혜 파면은 박근혜가 더욱 심화시킨 불평등하고 부정의한 사회를 뜯어고치고 바꾸는 일의 출발일 뿐이다. 박근혜의 악행은 아직 중단되지 않았다. 정권이 바뀌어도 기업주들을 위한 고통전가와 친제국주의 정책들은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적폐와 싸우는 일, 정권 퇴진 염원의 밑바탕에 깔린 불평등과 부정의의 구조를 변화시키는 일에는 더 긴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더 효과적인 정치와 전략이 필수적이다. 이 과정에서 쓰디쓴 논쟁과 난관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겐 희망을 가질 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다. 진보진영 일각에서도 정권 퇴진 운동을 공상이라고 비웃던 반년 전과는 분명히 상황이 다르다.

이제 사람들은 4년 전 박근혜 당선에 좌절하고 한숨 짓던 사람들이 아니다. 대중 스스로의 힘으로 사악한 통치자의 중도 하차를 이뤄 낸 사람들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오래 핏빛 독재를 자행했던 세력을 계승하고 싶어 했던 바로 그 정권을 끝장낸 사람들이다.

여세를 몰아 정권의 청산을 위한 투쟁을 이어가자. 일터에서, 학교에서, 거리에서, 지역사회에서 노동자·민중의 조건 개선과 해방을 위해 싸우자. 교만한 지배자들에게 단결과 연대의 힘을 보여 주자. 권력을 쥔 자들에게 주눅들지 말고 그들에게 우리를 존중하라고 말하자. 박근혜 퇴진은 투쟁하는 민중의 자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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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1일 '박근혜 없는 봄의 첫날’

“우리가 해냈다. 박근혜는 끝났다. 우리가 끝냈다”

3월 25일, 4월 15일에 다시 모이자

박근혜가 가니 거짓말처럼 봄이 왔다. 올해 들어 가장 따듯하고 화창한 날, 본대회가 시작하기 전부터 광화문광장은 흡사 봄 축제를 즐기러 나온 것 같은 분위기로 채워졌다. 다시 아이들 손을 잡고, 또는 유모차를 끌고 나온 젊은 가족들도 많았다.

사악한 통치자를 민중의 힘으로 쫓아낸 감격스런 일을 축하하고, 새로운 투쟁의 시작을 다짐하러 수십만 명이 다시 모였다. 박근혜를 구속하라, 적폐를 청산하자는 염원이 여전한 것이다.

사람들은 ‘우리가 해냈다’며 곳곳에서 감격해 했다. 개선장군처럼 의기양양한 표정들이었다. 춤을 추는 사람도 많았다. 오늘 하루만큼은 걱정을 잊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승리를 즐기며 스스로를 칭찬하는 축제의 날이었다. 사람들은 행진이 끝나고도 콘서트 등을 즐기며 광장을 쉽게 떠나지 못했다. 흔치 않은 감격과 승리의 여운을 즐기고 싶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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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노동자 연대〉, 사진공동취재단, 노동과 세계, JTBC 뉴스룸 영상 캡쳐, 코리아넷, 농림축산식품부, 미 공화당, 정규재 TV 영상 캡쳐, 평화뉴스

 

제작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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